칼럼

아버지의 구두

페이지 정보

최고관리자 작성일23-06-09

본문

더러운 구두를 신으시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낡았을지언정 아버지는 늘 거울같이 닦아진 말끔 상태의 구두를 신으신다.

 

 


특히 필자가 자주 바라보는 부분은 아버지 구두 뒷창인데, 필자의 구두와 늘 비교가 된다.

 

 

급한 출근하는 탓에 구두를 좌우로 짓이기며 억지로 뒤꿈치를 밀어 넣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나의 구두 뒷창은 늘 수백 번 고통을 받다가 결국 안쪽으로 접혀 말려들어간다. 하여 한 구두를 1년 이상 신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반면, 아버지는 늘 그러하셨듯 신사같이 구두칼로 정갈하게 구두를 신으시고는 여유 있게 현관을 나가시고는 했다.

 

 

구두 뒷창이 뭔 소리냐 싶겠지만, 이런 작은 버릇은 우리의 삶에 큰 순간으로 작용하고는 한다.

엉망인 구두 신기 습관과 달리 필자가 갖고 있는 좋은 습관은 "담당 사건 계속 생각하기."이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노래를 들으며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암기하듯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이는 것이 습관이다.

아마도 필자에게 첫 스승이셨던 한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맡았던 사건 수가 엄청났기에, 당시 개개의 사건에 실수를 하지 않고자 들였던 습관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 여름 즘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출근 중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한 안타까운 사연의 유가족들 사건을 진행 중이었다.

 

 

가해자 차량의 과실비율이 100%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건 자체는 복잡하지 않았다.

게다가 망자의 나이가 많지 않아, 60세까지의 일실수익을 계산한다면 적지 않은 금액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의 경우 망자가 40세이고, 평소 받던 월급이 월평균 300만 원이라면 1/3 생계비를 제외한 200만 원/X 20= 4.8억 원이 된다. (60- 40) (60세부터 65세까지는 도시 일용근로자 수입으로 계산하나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와 같이 계산한다. 변호사분들의 오해가 없길 바란다.)로 일실수익이 계산된다.

 

 

 

여기에 퇴직금과 장례비 그리고 위자료 1(서울중앙지방법원 기준 교통사고 사망사건은 위자료 1억으로 일괄 계산되는 편이다.)을 포함하면 약 6억 원이 넘는 금액을 보험금으로 수령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여느 변호사들이 알고 있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사건을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역시 퇴근하며 사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의뢰인에게 6억 정도의 보험금이 갈 텐데 어린 자녀들을 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하기 충분한가라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말이다.

 

 

물론 망자의 교통사고가 출근길에 일어난 것이기에 산업재해 신청을 통해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만 중복 배상 방지 원칙에 따라 1)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유족급여를 받거나 2) 자동차보험에 따른 보험금을 수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선배 변호사님들에게 물었을 때에도, 동료 변호사들과 식사 중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심지어 근로복지공단에 방문하여 필자가 직접 확인했을 때에도 같은 답변을 들었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퇴근길 정차 중, 문득 내가 확인한 것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근거한 것이지 관련 법령을 확인해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렇다. 변호사라는 인간이 관련 법령을 안 열어본 것이다.

 

 

만일 근로복지공단이 틀렸다면, 혹 교통사고를 전문으로 한다는 동료가 틀렸다면, 선배님들이 별생각 없이 말씀해 주신 거라면 나는 잘못된 길로 이미 들어선 것이다.

 


 

늦은 새벽 찾아 본 법령은 다음과 같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80조는 수급권자가 동일한 사건으로 인해 이 법에 따른 보험급여를 받으면 민법이나 다른 모든 법령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은 면제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 면제되는 범위에 대하여 유족급여를 일시금으로 수령할 때의 금액만을 면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62조에 따라 유족보상 일시금은 다시 별표의 규정을 따라가야 하는데, 같은 법 별표 3은 유족급여를 일시금으로 받는 경우 평균임금의 1,300일 분만으로 산정한다.

 

 

정리하자면, 유족급여 수령을 하더라도 자동차보험에 따른 보험금 중 일부만을 공제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 번 바와 같이 월평균 300만 원을 수령하던 망자는 평균임금이 약 10만 원 정도 될 것이고 그렇다면 망자의 유가족들은 유족연금으로 매월 200만 원가량을 평생 받을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자동차 보험금으로 받을 6억 원에서 약 13천만 원 (평균임금 10만 원 X 1300)만을 공제하면 되니 결과적으로 보험금 47천만 원 + 평생 200만 원 매월 지급 (물가 상승률에 따라 상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머리가 멍했다.

 


밤을 새워 재판부에 산업재해 신청을 통한 유족급여를 받을 예정이니 재판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재판부는 법강 변호사들의 요구를 해량해 주셨고, 결국 망자의 유가족들은 유족급여와 자동차 보험금을 전부 수령할 수 있었다. (같은 사건을 하시고 계시는 변호사님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구두 뒷창은 아무것도 아니다.

짓이겨져 접힌다면 수선을 하거나 다시 구입하면 그만일 것이다.

다만, 구두칼을 사용하는 것이 귀찮아 뒤꿈치를 밀어 넣는 습관과 순간이 쌓인다면 그 결과는 예상보다 무거울 것임을 나 자신에게 주지시킨다.

 

관련 분야

관련 구성원구성원 더보기